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501

연암 박지원 29 - 청빈낙도

[<조선의 관리와 서기> 영국 선박 알세스트(Alceste)호의 선의였던 맥레오드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겪은 일을 써서 1818년에 펴낸 『알세스트호 항해기(Voyage of the Alceste to Lewchew)』에 실려 있는 삽화. 1816년 9월 4일과 5일, 영국의 Alceste호(함장 Murry Maxwell)와 Lyra호(함장 Basil Hall)가 청나라 방문 후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던 중 충남 서천군 비인현 마량진에 정박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사를 위해 배에 오른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 일행을 그린 것이다. 긴 담뱃대를 들고 큰 갓을 쓴 조선 관리를 묘사하였지만, 얼굴 생김은 서양사람아다.] 주변에서 박지원을 위하는 마음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연..

연암 박지원 30 - 면천군수

[ 1872년에 제작된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의 옛 모습을 담은 지도. 채색 필사본, 79.5 x 63.3㎝, 지도책이나 지도첩에 포함되지 않은 단독 지도]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한양으로 올라온 박지원은 한가로워지자 전원으로 돌아가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처남 이재성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제 늙어 백발이 성성하니 다시 세상일을 도모할 수 있겠나? 장차 한적한 터를 하나 잡아 자네와 함께 소요(逍遙)한다면 여생이 지극한 즐거움이 될 것 같네.” 그리하여 지금의 종로구 계동에 있는 과수원 하나를 사서 터를 닦고 흙벽돌로 조그만 집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박지원은 제용감(濟用監)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의금부 도사로 자리를 옮기고 이어 의릉령(懿陵令) 직을 맡았다. ▶제용감(濟用監) 주부..

연암 박지원 31 - 양양부사

박지원이 면천군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방식은 안의현에 있을 때와 같았다. 부임한지 몇 달 만에 행차 때 벽제 소리 등 번거로운 의례를 없애버리거나 간소하게 한 뒤 관아가 조용해졌다. 관내에 일이 없어 수령의 도장이 상자 속에서 며칠씩 잠자고는 했다. 그리고 몇 달씩 감옥이 텅 빌 때도 있었다. 그때 살인 용의자 한 명이 오랫동안 혼자서 빈 옥에 갇혀있었는데 박지원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다시 심리할 예정이었다. 박지원은 그가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목에 씌운 칼과 발에 채운 차꼬를 풀어주고 간수 방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죄수는 감동하여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천군 남쪽에 양제(楊堤)라는 제방이 있었는데, 고을로 흘러드는 물을 가두어 모아두는 곳으로 그 물을 사용하는 농토가 꽤 ..

연암 박지원 32- 졸(卒)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셨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하셨다. 무릎을 모아 조용히 앉아 계실 때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으셨다. 안색은 불그레하고 윤기가 나셨다. 또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레나룻이 나셨다. 이마에는 달을 바라볼 때와 같은 김은 주름이 있으셨다.” 중년에 박지원을 그린 초상화가 집안에 두 점이 있었는데 박지원이 별로 닮지 않았다고 하여 없애버렸다. 그래서 아들 박종채는 다시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으나 박지원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결국 초상화조차 남기지 못한 것을 비통해 했다. 지금 전하는 박지원의 초상화는 박종채의 아들인 박주수가 그린 것이라 한다. 박주수는 1866년 ..

박지원과 유한준의‘백년만의 화해’

중국 후한시대 반고(班固)와 부의(傅毅)는 문장으로 자웅을 겨루었다. ‘한서’를 지은 반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의 역시 뛰어난 글솜씨로 당대를 주름잡았다. 그러나 라이벌 관계인 둘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은근히 상대방을 헐뜯었다. 요즘도 회자되는 ‘문인상경’(文人相輕)’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문인들은 서로 상대를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과 고문(古文)의 대가 창애 유한준(1732~1811) 사이도 ‘문인상경’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문학공부를 같이하며 세상일을 함께 토론한 문우(文友)이자 학문의 도반(道伴)이었다. 그러나 문학적 명성이 높아지자 두 사람의 ..

박규수부터 오세창까지…황초령비 탁본에 쓰인 글의 비밀은

이경화 연구원, 1938년 中서 돌아온 서울대박물관 탁본 분석 다산(多山) 박영철(1879∼1939)은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였지만, 수집한 유물을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에 기증해 서울대박물관이 만들어지는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그의 유족이 1940년 경성제대에 전달한 유물 중에는 '신라왕정계비'(新羅王定界碑) 탁본 족자도 있었다. 신라왕정계비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6세기 중반 함남 함흥 황초령에 세운 비석으로, 서울 북한산 비봉과 경남 창녕, 함남 이원 마운령에 건립했던 비석과 함께 '진흥왕순수비'로 불린다. 박영철이 기증한 황초령비 탁본은 그가 1938년 중국 베이징 류리창(琉璃廠)에서 구매한 것이다. 이 탁본이 특별한 이유는 비문의 사방에 한국과 중국 문인 10여 명..

환재(桓齋) 박규수(1807~1877)의 명저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義)

집을 꼭 지어야 하나 ‘굳이 내가 소유하지 않아도 즐기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원림(園林)이나 누정(樓亭) 뿐이겠는가? 천하의 사물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원림이나 누정의 경우가 특별히 더 그런 것뿐이다. 서울에서 수십 리 이내의 가까운 지역에는 사람들이 조성한 별서(別墅)와 농장이 많다. 어떤 것은 강가를 따라 있고, 어떤 것은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어떤 것은 산을 등지고 계곡에 걸쳐 있기도 하다. 제각기 멋진 풍경 하나쯤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산수(山水)를 평가하고 논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저쪽 경치를 들어다 이쪽 경치를 비교하면서 앞다퉈 제가 본 풍경을 자랑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정말 콧방귀를 뀔 일이다. 빼어난 경관과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는 천하의 명..

■연암 박지원의 반성문이 된 이방익의 <표해가>

1542(중종 37년)~1546년(명종 1년) 제주사람 박손의 4년 유구(류큐) 체류기인 유대용의 가 있다. 제주인 고상영의 안남(베트남) 표류기(1687~1688년)는 역관 이제담의 구술정리 내용을 그대로 실은 정동유(1744~1808)의 문집()에 수록돼있다. 이지항은 하급무관(수어청군관·6품) 신분임에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표류경험(1756~57)을 기록()을 남겼다. 또 이방익이라는 인물은 1796~97년 사이 제주 앞바다에서 뱃놀이 도중 대만-복건-소주·양주 등을 거쳐 북경을 통해 귀국했다. 그런데 이방익의 표류기인 를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쓰게 된 동기가 흥미롭다. 즉 1792년(정조 16년) ‘타락한 문체를 바라잡겠다’는 이른바 문체반정을 외치면서 박지원의 를 지목해서 문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