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501

연암 박지원 9 - 글짓기

아버지는 금강산을 유람하실 때 라는 시를 한 수 지으셨다. 판서 홍상한(洪象漢)1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도 이런 필력이 있었던가? 이는 거저 읽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중국 붓 크고 작은 것 2백 개를 문객(門客)으로 하여금 갖다 주게 하여 정중한 뜻을 표하였다. 「과정록」 라는 시는 ≪연암집≫에 실려 있지만 ≪열하일기≫에도 실려 있다. 연행 길에 동행들이 청돈대(靑墩臺)에 해 뜨는 구경을 가자고 청해왔지만 박지원은 조용히 잠을 자기 위해 사양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예전 총석정에서 해돋이 구경을 하고 지은 시라며 이 시를 실었다. 박지원 자신도 꽤 잘 지은 시라 자부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7언 70구(句)로 된 이 한시(漢詩)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연암 박지원 10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박지원이 쓴 아홉 편의 전(傳)이 실려 있는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연암집』 8권 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맨 앞에 자서(自序)가 있고 이어서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의 순서로 실려 있다. 이 중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은 유실되어 목록만 있고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아들 박종채는 「방경각외전」에 대하여 「과정록」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벗 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좇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세태가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이런 세태를 미워하셨다. 그래서 아홉 편의 ..

연암 박지원 11 - 마장전

[1894 ~ 1901년 사이 조선에서 살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성 화가 콘스탄스 테일러(Constance Tayler)가 그린 한양거리풍경] 은 박지원이 스무 살 때인 1756년에 지은 글이다. 오륜(五倫)1 끝에 벗이 놓인 것은 보다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마치 오행(五行)중의 흙이 네 철에 다 왕성한 것과 같다네2 친(親)과 의(義)와 별(別)과 서(序)에 신(信)아니면 어찌하리3 상도(常道)가 정상적이지 못하면 벗이 이를 시정하나니 그러기에 맨 뒤에 있어 이들을 후방에서 통제하는 것이라 세상 피해 떠돌면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논하는데 그들의 얼굴이 비치어 보이는 듯하네. 이에 마장전(馬駔傳)4을 짓는다. 말 거간꾼이나 집주릅5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것6이나, 관중(管仲)과 ..

연암 박지원 12 - 예덕선생전

[1904년 조지 로스가 찍은 숭례문 앞, 거리 시장. 사진출처 : 호주 사진작가의 눈을 통해 본 한국] 역시 박지원이 스무 살 때인 1756년에 지은 글이다. 선비가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해도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엄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하는 일은 더러울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이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1을 짓는다. 선귤자(蟬橘子)2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3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엄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行首)’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엄’은 그의 성(姓)이다. 자목(子牧)이 ..

연암 박지원 13 - 민옹전

[1880년에 촬영한 숭례문 앞의 거리. 출처 시사IN] 박지원이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던 시절, 민유신(閔有信)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 때 박지원은 열여덟 살이었고 민유신은 73세였다. 그 후 나이 차를 넘어 두 사람은 서로 말동무가 되어 수년간을 지내다가 그가 죽자 그에 대한 일화를 엮어 1757년에 을 지었다. 민옹(閔翁)은 사람을 황충(蝗蟲)같이 여겼고 노자(老子)의 도를 배웠네. 풍자와 골계로써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이에 민옹전(閔翁傳)을 짓는다. 민옹(閔翁)이란 이는 남양(南陽)1 사람이다. 무신(戊申)년 난리2에 출정하여 그 공으로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그 ..

연암 박지원 14 - 광문자전

광문(廣文) 또는 달문(達文)이라 불리는 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이다. 영조 초년에 태어나 정조 말년까지 생존했던 학자 이규상(李圭象, 1727~1799)은 『일몽고(一夢稿)』라는 인물지(人物誌)를 지었는데, 책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는 유학자, 선비, 문인, 화가, 실학자 등 영조, 정조 시대의 문화부흥기를 이끈 주역들을 분야별로 나누어 망라하였다. 그 가운데 각 방면의 재인(才人)들을 묶어 소개한 에는 달문이라는 이름으로 광문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달문이란 사람은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서울 종루 거리의 걸인이다. 의협을 숭상했으며 얼굴이 크고 이마가 넓었고 입이 커서 주먹이 들락거렸다. 그는 늘그막에도 상투를 틀지 않고 총각머리를 하였으며, 온통 기운 옷을 입고 성한 ..

연암 박지원 15 - 양반전

[스코틀랜드 출신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 양반(兩班)은 원래 관제상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지칭하는 개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벼슬과 관계없이 지배 신분층으로서의 사족(士族)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널리 쓰였다. 사족은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이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해서 다 같은 양반이 아니었다. 조선 왕조가 햇수를 더해 가는 동안 같은 양반이라도 문묘에 종사된 대현(大賢)이나 종묘 배향공신(配享功臣)을 배출한 국반(國班), 즉 온 나라가 인정하는 양반 가문이 생겨났고 대가(大家) 또는 세가(世家)라 불리는 권문세가가 등장했다. 또한 계속 정권에 참여한 양반인 벌열(閥閱)과 정권에서 소외되어 지방에 토착 기반을 둔 향반(鄕班)의 구별도 생겨났다. 향반 ..

연암 박지원 16 - 호질(虎叱)

[‘까치호랑이’ 그림을 한자로 호작도(虎鵲圖) 또는 작호도(鵲虎圖)로 번안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명칭은 기록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그저 호도(虎圖) 또는 맹호도(猛虎圖)라고 했다 한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액막이와 경사, 즉 벽사기복(辟邪祈福)의 의미를 갖는 ‘세화(歲畵)’이다. ‘세화(歲畵)’는 ‘새해맞이 그림’이란 뜻으로, 정초에 액운을 막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를 담아 집안에 한시적으로 붙여놓는 그림이다.] 양반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은 이다. 이 한문소설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관내정사(關內程史)」편 7월 28일자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을 실으면서 이 글의 출처에 대하여, 북경으로 가는 도중 하룻밤 묵었던 옥전현(玉田縣)의 심유붕(沈由朋)이라는 사람 점포 ..

연암 박지원 17 - 김신선전

[김홍도 지본담채, 28.3 x 41.5cm, 간송미술관] 은 박지원이 20대 전후에 썼던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의 다른 소설들보다는 좀 더 후기의 작품이다. 글 속의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박지원이 28세 때인 1764년(영조 40) 이후에 쓴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전히 전(傳)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세월이 흐른 탓인지 문체는 조금 더 수필체에 가까워졌다. 글에는 옛 한양의 지명과 호칭이 많이 나와 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홍기(弘基)는 대은(大隱)이라 노니는 데 숨었다오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았네2 이에 김신선전(金神仙傳)을 짓는다. 김 신선(神仙)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연암 박지원 18 - 우상전 1

은 영조 때의 역관(歷官)이었던 우상(虞裳) 이상조(李湘藻, 1740 ~ 1766)1가 죽자 박지원이 그가 남긴 시와 행적을 모아 엮은 열전(列傳) 형식의 한문소설이다. 하지만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있던 끝부분이 , 과 같이 떨어져 나가, 전해지는 글은 완결본이 아니다. 박지원이 <우상전>을 쓴 것은 이상조가 죽은 1766년(영조 42) 이후로, 박지원이 서른이 넘은 때이다. 우상(虞裳)은 이상조의 자(字)이고, 호는 송목관(松穆館)이다.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때인 1759년(영조 35)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뒤에 종6품인 사역원(司譯院)2 주부(主簿)3에 까지 올랐다. 그의 아버지 이덕방(李德芳) 역시 역관으로서 정5품의 상계(上階)인 통덕랑(通德郎)까지 올랐던 인물인..